왕을 포기한 왕자 효령대군
“임금은 세종대왕처럼, 인생은 효령대군처럼”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왕이 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 내려놓고, 90세 넘어서까지 장수한 왕자.
세종대왕의 둘째 형, 효령대군의 이야기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효령대군의 생애와 종중이 보유한 부동산 현황, 현재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후손들, 그리고 정치계 에피소드를 정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효령대군은 불교에 귀의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인지도 개인적으로 분석해보겠습니다.

효령대군 생애
서울 방배역 4번 출구에서 나오면 보이는 사당.
서울 서초구 금싸라기 땅에 있는 이곳에는 세종대왕의 둘째 형 효령대군의 묘소가 있습니다.
효령대군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형은 양녕대군, 동생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종대왕입니다.
어린 시절 효령은 외가에서 자랐는데, 이는 원경왕후가 앞서 세 아들을 잃은 경험 때문에 왕자들을 분산해 키웠기 때문입니다.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자연스럽게 효령대군이 왕위 후보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 즉 세종을 선택합니다.
실록에는 효령대군이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점이 언급됩니다.
실제로는 태종 이방원이 보기에는 왕권을 강화하기에는 너무 온화한 성품과 불교에 심취한 효령대군이 왕으로서 부적합하다고 판단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효령대군의 형님인 양녕대군은 어린 시절부터 세자에서 폐위될 정도로 주색에 빠져 있었던 반면, 같은 배에서 나온 효령대군은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했다고 알고 있을 만큼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던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효령대군 장수 비결
효령대군은 약 90세 가까이 생존하여 조선 시대 드물게 매우 장수한 인물입니다.
조선시대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사실상 매우 이례적인 수준으로, 지금 시대로 치면 120세를 채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효령대군의 장수 비결로는 왕권을 둘러싼 권력 다툼에서 한 발짝 벗어나 스트레스가 비교적 적었고, 술을 전혀 하지 않았던 점, 그리고 채식을 즐겼던 점이 언급됩니다.
다만 효령대군이 불교에 심취하여 채식만 한 것으로도 알려졌는데, 그의 초상화에 담겨진 풍채를 보면 채식만 한 것 같지는 같고, 육식과 채식을 균형 있게 섭취한 것 같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자신의 장례 기간에도 세종의 고기 반찬을 챙기라는 말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질만큼 육식을 즐겼던 세종의 수명이 52세였던 점을 고려하면, 효령대군의 균형 잡힌 식단이 장수에 효과가 있었던 듯합니다.
그리고 태종 이방원과 그의 아들들이 장수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도 보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56세, 첫째 양녕은 68세, 둘째 효령은 91세, 셋째 세종은 52세에 사망했는데, 조선 임금의 평균 수명이 47세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들 모두 장수한 편입니다.
세종대왕은 현대 의학에서 당뇨 합병증을 앓다가 사망하신 것으로 알려졌는데, 육식 위주의 식단과 매우 부족한 운동량, 왕으로서의 업무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반면 효령대군의 경우 불교의 영향으로 채식도 즐겼고, 전국의 각종 사찰 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산행을 많이 했던 점이 장수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왕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오래 살았다”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효령대군 후손
효령대군의 직계 후손인 효령대군파는 오늘날 전주 이씨 가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효령대군파 후손은 약 50만명 규모로, 전주 이씨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헌종 서거 후 직계 혈통이 단절되어 강화도에서 유배 살이를 하던 철종이 임금이 될 정도로 혈통 부족에 시달리던 세종대왕의 후손과는 매우 다른 모습입니다.
참고로 철종은 헌종에게 7촌 재종숙으로, 항렬상 숙부뻘에 해당하여 당시 철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에 논란이 많았습니다.
당시 세종대왕의 후손들은 왕위 계승을 놓고 피바람이 부는 권력 다툼에 휘말려야 했고, 왕이 되지 못하는 왕자들은 숙청되거나 역모죄로 유배되었습니다.
철종 역시 그의 가족이 역모죄에 몰려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결국 어린 시절부터 강화도에서 생활해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왕 자리를 양보한 효령대군의 후손들은 왕권 다툼에서 한 발짝 벗어나 왕의 친인척으로서 조선 사회에서 고위층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효령대군파 유명 연예인
여러 연예인과 유명 인물들이 효령대군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효령대군파 후손 이름에는 항렬에 따라 이름에 항렬자가 들어가서 이름을 보면 항렬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현재 연예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인물 중에는 효령대군파 19대부터 21대가 가장 많습니다.
효령대군파 19대손 항렬자는 이름 마지막 글자로 재가 들어가는데, 오징어게임 주연으로 유명한 배우 이정재와 최근 연예계 복귀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휘재가 대표적입니다.
20대손 항렬자는 이름 가운데 정 또는 수가 들어가는데, 연예계 대표 인물로는 이수만과 개그맨 이수근이 있습니다.
21대손 이름 마지막에는 규가 들어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경규와 소녀시대 써니, 그리고 이번 영상을 만든 이진규가 있습니다.
소녀시대 써니의 본명은 이순규로, 써니 아버지는 이수영입니다.
이수영은 항공대학교 밴드 활주로의 메인보컬로 활동했습니다.
여기서 활주로는 우리가 라디오 DJ로 잘 알고 있는 배철수가 이끌던 밴드였습니다.
이수영의 동생은 SM엔터의 수장으로 유명한 이수만으로, 이수만은 써니에게 삼촌인 겁니다.

정치계 에피소드
정치계 에피소드로는 근현대 정치 인물 이기붕이 언급됩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효령대군의 첫째 형인 양녕대군파의 16대손이었고, 이승만의 오른팔인 이기붕은 효령대군파의 17대손으로 항렬만 따지면 이기붕은 이승만의 아들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이 이승만 양자로 들어가면서 항렬상 손자가 할아버지 양자로 들어간 셈이라 종친회에서 반대가 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효령대군파 보유 부동산
전주이씨 가운데 가장 많은 후손을 보유한 효령대군파 종중은 막대한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효령대군파 종중은 서울 방배동, 무교동 일대에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상당한 자산 규모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방배역에 위치한 청권사 바로 맞은 편에 종중 건물인 프린스 효령 빌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효령대군 초상화
한편 효령대군은 가장 장수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초상화가 드물게 전해지는 조선 전기 인물 중 한 명입니다.
현재 태종 이방원과 첫째 아들 양녕대군, 셋째 세종대왕의 초상화는 소실되어 없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은 각종 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는데, 효령대군의 초상화는 효령대군이 자주 찾던 관악산 사찰에서 보관됐던 덕분에 조선 왕족 중에 초상화가 드물게 남아있습니다.
참고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대왕의 영정은 김기창 화백이 상상으로 제작한 초상화입니다.
현재 김기창 화백의 친일 활동은 물론, 자신의 외모와 비슷하게 세종대왕의 초상화를 그려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효령대군의 초상화를 보면 온화한 이미지와 달리 체격이 크고 수염이 인상적인 모습입니다.
실제 세종대왕의 외모도 우리가 알고 있는 영정의 모습이 아닌, 효령대군의 초상화와 비슷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태종 이방원은 “효령의 외모가 자신과 가장 닮았다”고 언급했고, 양녕과 세종도 비슷한 외모였다고 전해집니다.
심지어 양녕대군은 효령대군이라 속이고 술집에 들어갔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두 형제가 매우 닮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효령대군은 불교에 귀의했나
마지막으로 효령대군이 불교에 귀의했는지도 살펴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효령대군은 불교에 심취했던 왕족이었을 뿐, 불교에 귀의하여 속세를 버린 인물은 아닙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효령대군은 정실부인에게서 6남 1녀를, 측실로부터 1남 2녀를 두어, 모두 7남 3녀를 두었습니다.
효령대군 말년에 환갑을 넘긴 그의 아들들이 효령대군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효령대군에게는 조카가 되는 수양대군 세조가 단종을 몰아낼 때, 양녕대군은 적극적으로 수양대군을 지지했고, 효령대군 역시 수양대군을 지지했다는 내용을 고려했을 때 말년에도 정치적 활동을 유지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실제로 수양대군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집권하고도 효령대군은 집안의 어른으로서 대접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심지어 수양대군 세조의 손자뻘인 성종이 왕으로 재위할 당시까지 예우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겨진 것을 보면 효령대군은 정치적 감각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효령대군은 당시 숭유억불을 강조하던 조선 전기 시대의 왕족 중의 왕족으로서, 종교적 신념만으로 대놓고 불교에 귀의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실제로 세종대왕 집권 당시 신하들이 효령대군의 불교 행사를 놓고 거세게 비난하자 세종대왕이 이를 무마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마무리
왕이 될 기회를 가졌지만 내려놓았고 대신 안정과 장수를 선택한 효령대군,
그 결과 조선 왕실보다 더 크게 번성한 가문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남았습니다.
“임금은 세종대왕처럼, 인생은 효령대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