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대물림, 태어난 나라와 부모가 80%…내 인생은 얼마나 정해져 있을까?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어느 부모 밑에서 자랐는지. 누구도 고를 수 없었던 이 두 가지, 그리고 그 위로 이어지는 부의 대물림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정할까요.

“노력하면 된다”는 말과 “결국 집안이 다 정한다”는 말은 둘 다 익숙합니다. 경제학자들은 이 질문을 숫자로 분석해 왔습니다. 결과는 생각보다 냉정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계 불평등 연구와 수백 년을 추적한 성씨 연구,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그리고 불교와 유교의 오래된 개념까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부의 대물림, 태어난 나라와 부모가 결정

태어난 나라 하나로 소득 격차 절반 설명

세계 불평등 연구로 유명한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는 전 세계 사람들의 소득 차이를 분해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하나만으로 격차의 절반 이상이 설명됐습니다. 여기에 부모의 소득 계층을 더하면 설명력은 약 80%까지 올라갔습니다.

밀라노비치는 이를 ‘시민권 프리미엄’이라고 불렀습니다. 부유한 나라의 하위 10%가 많은 개발도상국의 상위 10%보다 잘사는 현실을 생각하면 과장이 아닙니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격차가 얼마나 벌어질 수 있는지는 태국 부익부 빈익빈 현실 글에서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세계적으로 상위권에서 출발했다는 뜻입니다. 그다음부터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부모와 본인의 몫입니다.

부의 대물림 10세대가 지나도 남는다

부모의 영향은 한 세대에서 끝날까요. 경제사학자 그레고리 클라크는 저서 『The Son Also Rises』에서 희귀 성씨를 수백 년간 추적했습니다. 영국과 스웨덴, 중국 등에서 조상의 사회적 지위는 10세대가 지나도 흔적이 남았습니다.

한 세대씩 보면 집안의 형편은 평균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긴 시간으로 보면 그 속도가 매우 느렸습니다. 부모와 자식만 비교한 기존 연구들보다 대물림이 훨씬 강했던 셈입니다.

나라나 지역 단위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옵니다. 경제학자 멜리사 델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 페루에서 광산 강제노역(미타)이 시행됐던 지역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소비 수준과 아이들의 성장 지표가 낮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경제학자 네이선 넌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 피해가 컸던 민족일수록 오늘날 타인에 대한 신뢰가 낮다는 점을 보였습니다. 조상이 겪은 일과 조상이 한 선택이 제도와 문화, 심리를 통해 후손에게 남는 것입니다.

무엇이 대물림되나…자산, 관계, 습관

조상과 부모의 몫은 몇 가지 경로로 이어집니다.

자산: 땅, 돈, 사업은 가장 직접적인 경로이고 복리로 불어납니다.

사회적 자본: 인맥과 평판, 집안의 이름은 후손 대에도 문을 열어줍니다.

문화와 습관: 교육을 대하는 태도, 돈을 쓰는 방식, 위험을 대하는 성향은 가르치지 않아도 집안 분위기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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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기질과 능력의 일부가 이어지지만, 세대가 지날 때마다 절반씩 희석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유전적 연결은 빠르게 옅어지는데, 환경과 문화로 전해지는 몫은 훨씬 오래 간다는 것입니다. 피보다 자산과 습관이 더 끈질기게 대물림되는 셈입니다.

같은 부모 밑 형제는 왜 다르게 살까

그렇다면 인생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같은 나라,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자매는 두 변수가 완전히 같습니다. 그런데도 성인이 된 형제의 소득은 생각보다 꽤 다릅니다.

나라와 부모는 어느 운동장에서 뛸지는 거의 정해주지만, 그 운동장 안에서 어디에 설지는 상당 부분 열어둡니다. 전 세계를 놓고 비교하면 출생 조건이 압도적이지만, 한국 안에서 비슷한 출발점을 가진 사람끼리 비교하면 본인의 선택과 운이 차지하는 몫이 훨씬 커집니다.

개인 단위 예측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연구도 있습니다. 2020년 미국 프린스턴대 연구진이 주도한 ‘취약 가정 챌린지(Fragile Families Challenge)’에서는 160개 연구팀이 수천 가구의 아이들을 태어날 때부터 추적한 방대한 데이터로 15세 시점의 결과를 맞히려 했습니다.

머신러닝까지 동원했지만 결과는 단순한 기준 모델보다 아주 조금 나은 수준에 그쳤습니다. 집단의 경향은 뚜렷해도 한 사람의 인생을 정확히 맞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뜻입니다.

30대 이후 궤적은 생각보다 많이 읽힌다

다만 예측이 어려운 것은 갓 태어난 아이의 먼 미래입니다. 40세인 사람의 50세 자산은 훨씬 잘 맞힐 수 있습니다. 학력, 직업, 자산, 소비 습관이 이미 쌓여 있고 강한 관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산은 소득보다 관성이 더 강합니다.

국가데이터처·금융감독원·한국은행의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를 보면 그 관성이 숫자로 드러납니다. 2025년 3월 말 기준 가구 순자산 중앙값은 2억3860만원, 평균은 4억7144만원입니다. 상위 10%에 들려면 순자산이 11억20만원을 넘어야 합니다.

가구주 연령대별 평균 순자산은 39세 이하 2억1950만원, 40대 4억8389만원, 50대 5억5161만원, 60세 이상 5억3591만원입니다. 30대까지 쌓은 출발점과 기울기가 40~50대의 격차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나이대별로 소득과 자산이 어떻게 변하는지는 42세 정점, 61세 적자 인생 글에서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격차는 넓어지는 중입니다. 같은 조사에서 순자산 상위 10% 가구가 전체 순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6.1%로 2012년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높았고, 순자산 지니계수도 0.625로 역대 최고였습니다.

고도성장기 한국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통하던 예외적인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성장이 둔화되고 부동산 자산 격차가 벌어지면서, 젊은 세대일수록 부모의 경제력이 출발점을 가르는 힘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업보와 카르마, 옛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 구조는 오래된 종교 개념과 닮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 카르마(karman)는 원래 ‘행위’라는 뜻입니다. 행위가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인과의 법칙이 핵심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색채는 대중 신앙으로 퍼지면서 강해진 측면이 큽니다. 불교 유식학에서는 행위가 씨앗(종자·種子)처럼 남아 쌓이고, 그것이 나중의 성향과 결과를 만든다고 봅니다. 습관과 성향이 누적돼 인생의 궤적을 만든다는 설명과 거의 같은 구조입니다.

불교에는 공업(共業)과 별업(別業)이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공업은 여러 사람이 함께 지어 함께 받는 업, 별업은 개인이 지어 개인이 받는 업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태어났는지는 공업에, 어느 부모 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별업에 가깝습니다.

유교 경전 『주역』에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핵심은 ‘집안(家)’과 ‘쌓음(積)’입니다. 개인이 아니라 집안 단위로, 한 번이 아니라 쌓여서 후손에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수학의 적분(積分)도 같은 ‘쌓을 적’ 자를 씁니다.

옛사람들은 통계도 추적 조사도 없었지만, 조상과 부모의 행위가 자산과 관계, 습관의 형태로 쌓여 후손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던 셈입니다. 권선징악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결국 누적의 법칙입니다.

출발점 못 바꿔도 기울기 바꿀 수 있다

정리하면 한 사람의 경제적 궤적은 본인 생애만이 아니라 조상 세대부터 이어진 긴 구간의 적분 위에서 시작됩니다. 출발점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그 위에 쌓는 기록이 궤적의 기울기를 만듭니다.

TNI가 만든 인생 궤적 분석기는 이 두 가지를 나눠서 보여줍니다. 조부모와 부모의 경제력, 예상 상속을 ‘물려받은 출발점’으로, 학력과 직업, 소득, 저축률, 자산 운용을 ‘내가 쌓은 기록’으로 입력하면 은퇴 시점까지의 순자산 궤적과 같은 나이대에서의 위치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35세 맞벌이 가구(연소득 합계 9000만원, 순자산 1억8000만원, 저축률 25%)가 지금대로 가면 60세 예상 순자산은 약 12억300만원입니다. 이 가운데 물려받을 몫은 14% 정도이고, 나머지 86%는 지금까지와 앞으로 본인이 쌓는 몫입니다.

같은 가구가 저축률만 10%p 올리면 60세 자산은 약 14억8200만원으로 늘어납니다. 자산 운용까지 한 단계 바꾸면 약 18억500만원이 됩니다. 출발점은 그대로인데 기울기만 바꿔도 은퇴 자산이 6억원 넘게 달라지는 셈입니다. 같은 나이대 안에서의 위치도 지금 상위 36%에서 60세에는 상위 11% 수준까지 올라갑니다.

물론 이 결과는 예언이 아닙니다. 졸업 시기의 경기, 첫 직장, 집을 산 시점처럼 작은 운과 타이밍은 어떤 모델로도 지울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는 꽤 정확히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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